방패 기획자의 하루
최전방의 균열
"포코님, 잠깐 시간 되세요?"
크로우가 포코의 책상 앞에 섰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아직 푸른 마법의 잔광이 일렁이고 있었다. 밤새 방패들의 방어력을 복구하느라 수고했다는 증거였다.
"어, 크로우. 무슨 일이야?"
"그게... 요즘 최전방에 발작괴물들의 공격이 늘어나면서 Haevol 방패가 계속 손상되잖아요. 제가 밤새 방어력을 복구하는데, 문득 궁금해졌어요."
크로우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제가 방어력을 높일 때, Haevol 방패만 집중해야 할까요? 아니면 Candy 방패도 같이 올려야 할까요? 어차피 위급하면 Candy 방패도 최전방으로 이동시키잖아요."
포코는 펜을 내려놓았다. 단순해 보이지만 생각해볼 지점이 많은 질문이었다. Haevol에서 만든 방패는 방어력 100으로 최고 수준이었고, Candy의 방패는 80이었다. 평소엔 Haevol 방패가 최전방을, Candy 방패가 후방을 지켰지만, 괴물의 공격이 집중되면 Candy 방패도 전방으로 급파됐다.
"좋은 질문이네. 내가 정리해서 회의 한번 잡을게. Haevol이랑 Candy 기획팀이랑 같이 논의해보자."
완벽한 케이스 분류
포코는 사흘 동안 회의 자료에 매달렸다.
케이스 1: Haevol 방패만 최전방에 있을 때
- 크로우는 Haevol 방패 우선 복구
케이스 2: Candy 방패가 최전방으로 이동했을 때
- 2-1: Haevol 방패 방어력이 60 이하면 Haevol 우선
- 2-2: Haevol 방패 방어력이 60 초과면 Candy 방패도 함께 복구
- 2-3: 단, Candy 방패는 최대 90까지만...
문서는 계속 길어졌다. 포코는 스프레드시트를 만들고, 플로우차트를 그렸다. 각 케이스별로 예상되는 문제점과 해결책을 적었다. 솔직히 말하면, 케이스 2-2가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고, 자료도 그쪽으로 좀 더 무게가 실렸다.
회의 전날 밤, 포코는 화면에 띄운 자료를 뿌듯하게 바라봤다. 완벽했다. 어떤 질문이 나와도 답할 수 있었다.
체스터의 한마디
회의실에는 여섯 명이 모였다. Haevol 기획팀에서 포코와 동료 둘, Candy 기획팀에서 체스터와 그의 팀원, 그리고 크로우.
포코는 준비한 자료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케이스를 나누고, 각 상황별 전략을 제시했다. 참석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했다. 설명이 끝나자 포코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질문 있으신가요?"
체스터가 손을 들었다. Candy 마법 기획팀의 리더답게 침착한 표정이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포코님. 그런데 말이죠."
체스터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냥 Candy 방패는 크로우님이 방어력 안 올려주셔도 될 것 같아요. 저희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있거든요. 필요하면 저희 개발팀을 바로 출동시켜서 자체적으로 방어력 복구 작업 진행하겠습니다. 그게 더 명확할 것 같네요."
회의실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아... 그렇게 하시겠다고요?"
"네. 사실 저희도 Candy 방패 관리는 저희가 직접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Haevol 기획팀에 부담 드리고 싶지도 않고요."
다른 참석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하고 명확한 해결책이었다. 크로우도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게 정리하겠습니다."
포코는 미소를 지었다. 이슈가 해결된 건 좋았다. 정말 좋았다.
그런데.
노련미라는 것
회의실을 나서는 포코의 노트북 가방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사흘 밤을 새운 그 완벽한 케이스 분류는 이제 휴지통 행이었다.
'그냥 처음부터 물어볼 걸 그랬나?'
복도를 걷다가 포코는 멈춰 섰다. 사무실 창밖으로 마을의 방패들이 보였다. 은은한 푸른 빛을 내며 괴물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Haevol의 방패도, Candy의 방패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답은 의외로 가까이 있었네.'
포코는 피식 웃었다. 아마 다음번에도 비슷한 일이 생기면 또 밤을 새워 자료를 만들 것이다. 완벽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애쓸 것이다. 그게 기획자의 숙명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혼자 파고드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때로는 회의실에 모여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답이 나온다는 걸.
체스터가 복도에서 포코를 불렀다.
"포코님, 자료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그 정도로 깊이 있게 분석해주셔서 저희도 많이 배웠습니다."
"아니에요. 결국 안 쓰게 됐잖아요."
"그래도 그 과정이 있었으니까 저희가 확신을 가지고 결정할 수 있었던 거죠. 감사합니다."
체스터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자리로 돌아갔다.
포코는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노트북을 열고, 새 문서를 만들었다. 제목은 이렇게 적었다.
'다음 회의를 위한 메모 - 먼저 물어보기'
그리고 그 아래 작게 덧붙였다.
'하지만 준비는 철저하게.'
창밖에서 또 한 번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방패들이 다시 한번 빛났다. 포코는 모니터를 응시하며 다음 기획안 작성을 시작했다.
마을은 오늘도 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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