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의 고민
커피 향이 아직 옷에 배어있는 채로 사무실에 돌아온 라무는, 같은 팀의 제시가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고민에 빠져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손가락으로 템플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제스처가 그의 머릿속 복잡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제시님,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고 계세요?" 라무의 목소리에 제시가 고개를 들었다. 약간 주저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곧 솔직하게 말을 꺼냈다. "선배님, 요즘 맡은 상품 등록 화면을 기획하고 있는데요. 사용자가 입력해야 할 정보가 너무 많아서 이걸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막막하네요."
라무는 마음속으로 '역시 신입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선배로서 뭔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이런 문제는 누구나 한 번쯤 겪는 것이니까. "잠시만요, 저도 한 번 생각해볼게요." "아니에요, 선배님도 바쁘실 텐데 괜찮습니다." 제시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 웃음에 라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냥 귀여운 후배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정보를 그룹핑하고 단계를 나누면 되지 않을까?
라무는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몇 가지 자료를 찾아보았다. UX 가이드라인, 폼 디자인 베스트 프랙티스... 한참을 검토하던 그는 답을 찾은 것 같아 다시 제시에게 다가갔다. "수많은 정보 중에 일단 공통적인 유형끼리 묶어보는 게 어때요? 그룹핑을 하고, 한 페이지에 모든걸 보여주면 부담스러우니까 적당히 나눠서 3-4단계 정도로 만들어보세요." 라무는 최대한 시크한 표정으로 조언을 마치고 뒤돌아 자리로 갔다. 속으로는 '나름 멋진 선배인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며 제시가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살짝 웃음을 지었다. 제시는 라무의 조언을 받아들여 본격적인 기획에 들어갔다. 상품 유형과 카테고리 선택, 이미지와 설명 입력, 가격 관련 정보...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그룹핑했다. '이정도면 충분히 잘 한 거겠지?'
그래도 여전히 불편한데요? 하지만 그건 네 생각이고
기획이 끝나고 개발도 어느 정도 완료되어 QA 단계에 들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업무용 메신저에 QA팀 그레이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그레이: "제시님 안녕하세요. 기획하신 화면 테스트하고 있는데, 입력할 정보가 너무 많아서 사용자들이 불편해할 것 같아요. 개선할 방법 없을까요?" 제시는 잠깐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제시: "음... 제 생각엔 사용자들이 크게 불편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해당 건은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제시의 큰 실수였다.
자신만의 생각 관성에 사로잡혀 다른 의견을 무시한 실수
며칠 후 기획실 정기 회의가 있었다. 제시는 자신이 기획한 화면을 테스트 서버에서 시연하고 있었다.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하는데...
"스톱!" 대표인 샘의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렸다. "아니, 이 많은 정보를 사용자가 하나씩 다 입력해야 한다고? 이러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 제시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아... 네, 다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순간 제시의 머릿속에 그레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때 그레이 말을 무시하지 않고 다시 한번 생각해볼걸...' 자신의 고집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의 조언을 흘려들었던 것을 후회했다. 라무도 이 부분은 미리 짚어주지 못해 선배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디폴트 값으로 편리함을 제공하자
제시는 테스트 서버에서 직접 사용자의 입장이 되어 화면을 하나씩 사용해보았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정말로 정보량이 많고, 이걸 하나씩 입력하다 보면 중간에 포기하고 싶어질 것 같다는 것을. '디폴트 값을 미리 설정해두면 어떨까?' 사용자가 직접 입력하는 대신, 자주 사용되는 값들을 미리 설정해두고 필요할 때만 수정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기획을 개선했다. 며칠 후 다음 회의에서 수정된 내용을 보고하자, 샘은 만족스러워했다. 특별한 지적도 없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기획했으면 좋았을 텐데...' 제시는 아쉬워하면서도 다짐했다.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 다른 의견을 무시하는 실수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테스트서버에서 자신이 기획한 내용을 낯선 시각에서 많이 써보자
테스트 서버에서 실제 화면으로 사용해보니 기획할 때는 몰랐던 불편함들이 보였다. 사용자의 시선으로 경험해보는 것과 기획자의 시선으로 설계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앞으로는 테스트 단계에서 메소드 연기라도 해서 진짜 사용자처럼 써봐야겠다.' 제시는 한 단계 성장한 것 같았다. 샘의 그 날카로운 지적도, 어쩌면 후배를 성장시키려는 큰 그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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